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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걷고 있다. 결혼식을 축하하는 연회장을 뒤로하고 시골길을 향해 걸어간다. 마을 마권 판매소 안에는 책을 펼친 채 잠든 여자가 있다. 나중에 목이 결릴테니 깨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 걸어간다. 어느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온통 차지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걷는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난로의 열기 때문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뜨거운가 싶어 손을 뻗었다. 그의 의도는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녀가 그의 손짓을 오해하고 손을 뻗었다. 그는 사제직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그녀는 오늘 결혼했다. 예식은 교구 사제인 그가 진행했다. 기회가 있었으나,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는 계속 푸른 들판을 걷는다.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국내에 소개된 지 1년여 만에 서점가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가 된 클레어 키건의 신작 소설집. 1999년 데뷔작 <남극> 이후 평단은 작가의 차기작에 귀추를 주목했고, 8년 뒤 2007년 긴 침묵 끝에 세상에 꺼내 보인 이 책은 평단의 찬사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표제작 외에도 일찍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하며 자신이 엮은 영미문학 선집에 소개한 바 있었던 <물가 가까이>, 아일랜드 소설가 조 맥가헌에게 영향을 받아 쓴 <굴복> 등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질만이 남을 때까지 주변에 있는 것을 덜어냄으로써 삶의 중요한 순간을 더욱 분명하게 그려내는 키건의 작풍이 돋보이는 단편들로, 세밀하게 깎아 드러낸 암시와 은유적 표현들이 섬세하게 녹아있는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