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 엘 비아르에서 태어났으며,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서 수학한 뒤 후설에 관한 논문으로 졸업했다. 모교인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쳤고 예일 대학과 존스홉킨스 대학 등에서도 가르쳤다. 1987년부터 파리 사회 과학 고등 연구원의 연구 주임으로 재직했다. 1967년 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문자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 등 세 권의 저서를 발표함으로써 일약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떠올랐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정치 및 사회 문제에 관한 오랜 침묵에서 벗어나 유럽 공동체와 주권, 마르크스주의와 국제법, 탈식민주의, 인권과 민주주의 등에 관해 폭넓은 저작을 발표했으며, 현실 정치의 문제들에도 적극 개입했다.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불량배들』이 후기 데리다의 윤리・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저작들이다. 2004년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 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과 대화를 통해서 현존하는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 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루소나 후설, 하이데거 같은 근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 인문 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음성을 로고스를 생생하게 구현해 주는 본래적인 매체로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로고스 중심주의와 음성 중심주의가 나타난다. 이 때문에 데리다는 초기 저작에서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면서 문자 기록을 복권하고 텍스트의 복잡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1980년대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연관성이 폭로되고 데리다와 가까운 동료였던 폴 드 만의 초기 극우파 논설이 발굴되면서, 데리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히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법의 힘』과 1993년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는 “해체는 정의다”라고 선언하면서 전통적인 메시아주의와 구별되는 메시아적인 것의 해방적 이념에 기초하여 유령론의 정치를 제창한다.
데리다 사상에 입문하는 가장 좋은 통로는 그의 여러 대담집이다. 데리다는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대담을 남겼으며, 그의 대담은 그의 사상에 좀 더 간명하게 접근하기 위한 장소다. 데리다 초기 사상은 『입장들』에 수록된 세 편의 대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앙리 롱스와의 대담인 「함의」는 데리다 초기 저작의 문제의식을 쉽게 소개하고 있으며, 줄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인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는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의 관계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하다. 한편 마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텔켈』의 편집인들과 나눈 「입장들」이라는 대담은 마르크스주의와 탈구축의 긴장 관계를 이해하기에 아주 좋은 텍스트다. 로고스 중심주의와 음성 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축은 서양 형이상학의 지배 구조에 대한 전복의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1960년대 후반 파리 사상계를 지배하던 급진 좌파 사상 및 운동과 공명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는 음성 중심주의에 대한 탈구축 작업, 곧 그라마톨로지의 기획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제 설정으로 포섭하려는 『텔켈』 편집인들의 시도에 완강하게 저항한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물질, 모순, 실천, 역사 같은 개념들에 대한 충분한 탈구축이 없는 가운데 관념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주장하며 여러 차이들을 중심적인 모순으로 환원하고 결정적인 실천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이는 또 하나의 형이상학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탈구축의 실천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쇄신하거나 재구축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1993년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오랜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 후기 사상은 그의 제자이자 기술 철학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와 나눈 대담집인 『에코그라피』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에코그라피』는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현대 매체 기술에 관한 데리다의 견해를 가장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데리다 사상은 처음부터 기술에 대한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자 기록은 음성이라는 자연적 매체를 통한 현존의 생생한 전유가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꿈이라는 것을 보여 주며, 차연(差延)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항상 이미 지연과 차이화의 작용 결과라는 점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기술론은 구성적 기술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자연적 시공간 자체가 항상 이미 기술에 의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기술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인가? 여기에서 데리다의 ‘탈전유(exappropriation)’라는 신조어가 중요해진다. 기술을 원칙적으로 거부하고 무소유를 주장하는 비전유(exppropriation)와 기술의 도구적 효용만을 중시하는 전유(appropriation) 사이에서 유한한 전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이 개념이다. 2001년 9.11 이후 이루어진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이라는 제목의 대담에서는 ‘자기 면역(autoimmunity)’ 개념이 대담의 중심을 차지한다. 자기 자신과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해 면역 세포가 외부 물질이 아니라 주인 세포를 공격하여 발생하는 질병을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법을 비틀면서, 데리다는 자기 면역 개념을 이중적인 의미로 탈구축한다. 이는 먼저 외부(이슬람 세력 같은)의 침입에 맞서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려는 서양 민주주의의 경향을 가리킨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곧 민주주의의 자기 파괴, 자살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자기 면역의 또 다른 의미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민주주의의 구조 자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의 논리, 곧 주권의 논리를 약화시키고, 그 속에 이질성과 타자성의 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기 면역은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인 무제한적인 자기비판을 가리킨다.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폐쇄적인 일자로 고착되지 않고 무한정한 개선을 이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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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으로 분류한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국내에는 이처럼 번역되어 있으나 좀 더 정확히는 『문자 기록과 차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모두 1967년 출간된 데리다의 초기 대표작들이다. 따라서 이 책들은 난이도의 정도가 덜하다는 의미에서 ‘중급’이 아니라, 데리다의 다른 저작들을 읽기 위한 이론적 전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그의 대담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급에 놓을 수 있다. 『목소리와 현상』은 후설 현상학에서 기호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글쓰기와 차이』는 주로 20세기 프랑스 사상가와 작가의 텍스트에 대한 탈구축적 독서 모음집이며,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 루소와 관련한 ‘문자 기록(ecriture)’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이 세 권의 책에는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와 음성 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축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여러 주석가들은 이 세 권을 데리다의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기도 한다. 국내 독자들의 불운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한글로 읽을 만한 책은 『목소리와 현상』 정도라는 점이다.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국역본으로는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며, 『글쓰기와 차이』의 경우 그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이 번역본으로는 데리다의 논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초기 데리다 작업에 관한 논의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의 문제의식이 가장 체계적으로 표현된 책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이다. 데리다가 보여 주려는 것은, 플라톤에서부터 루소를 거쳐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에크리튀르, 곧 문자 기록을 폄하하고 음성이나 말을 중시하는 태도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진리 내지 로고스는 말 속에서, 생생한 대화 속에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문자 기록은 진리와 거의 관계가 없는 단순한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문자 기록은 아주 위험한 도구다. 왜냐하면 문자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생생한 대화 및 기억 능력을 퇴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처럼 진리 내지 로고스와의 관계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문자 기록이 사실은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임을 보여 주려 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결국 음성에 대해, 로고스에 대해 문자 기록이 우월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데리다는 기존의 위계적 지배 질서를 전복시켜 그중 열등한 위치에 있던 것을 새로운 지배자로 구성하는 것은 여전히 기존 질서를 되풀이하고 재생산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따라서 해체의 일반 전략은 단순히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위계 구조 자체의 탈구축을 시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의 탈구축이란, 가령 문자 기록을 음성에 대해 우월한 것으로 확립하거나 서양의 알파벳 같은 표음 문자에 대해 표의 문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 요컨대 ‘음성 중심주의’를 대체하는 ‘기록 중심주의’의 주창을 뜻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언어는 일종의 문자 기록이라는 점이다. 곧 문자 기록은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 언어가 구술 언어보다 역사적으로 선행했다는 주장이 아니라, 로고스 중심적 전통이 문자 기록에게만 부여했던 2차적 매개의 성질을 언어 그 자체가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어떠한 매체든 간에 생생한 현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으며, 모든 매체는 항상 재?현적이고 매개적인 지위를 갖는다. 더 나아가 ‘생생한 현존’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생생한 현존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차이들의 체계의 산물이며, 그러한 체계를 통해 성립하고 재생산되는 것이다. 『목소리와 현상』에서 데리다는 후설 현상학에서 기호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후설에게서도 음성 중심주의적인 태도가 나타남을 보여 준다. 특히 문자라는 외재적 기호 없이 ‘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기(s’entendre parler)’는 주체성이 성립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조건임을 드러낸다. 데리다가 보기에 가장 엄밀한 철학 중 하나인 후설의 현상학도 이처럼 음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라마톨로지의 문제 설정의 필요성이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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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정신에 대해서』는 이른바 데리다의 ‘정치적 전회’ 내지 ‘윤리적 전회’를 대표하는 저작들이다. 사실 데리다는 1980년대 중반까지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거의 발언하지 않았으며, 시사적인 문제나 정치적 쟁점에 관해 발언할 때에도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가운데 신중한 유보의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허무주의자라거나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채 사적 유희를 즐기는 유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9년 강연의 형태로 처음 발표되고 1992년 영어로 먼저 출간된 『법의 힘』은, 저작이 미친 사상적 충격이라는 관점에서는 데리다의 수많은 저작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책이다. 실제로 『법의 힘』은 여러 차례 학술지의 특집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미 학계에서 해체론의 수용 양상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데리다가 “해체는 정의다”라고 선언하고,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그 이전까지 전개된 탈구축의 문제 설정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는 모든 언어가 이미 오염된 언어이며 2차적 매개로서 문자 기록이라고 주장했듯이, 정의와 법의 관계,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관계도 ‘차연적 오염’의 관계임을 역설한다. 법이 정의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정의는 법 바깥에서 최악의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법 안에서, 법을 통해 자신을 구현해야 한다. 『법의 힘』의 부록으로 실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탈구축적 독서의 한 가지 논점이 이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제시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메시아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여러 종교적 메시아주의들과 구별되는 해방의 보편적 형식을 가리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메시아적인 것은 구체적인 해방의 운동이나 경험들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 자신을 변형하고 쇄신해야 한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유령론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재독해하는 것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이는 생생한 현실과 가상, 물질과 이데올로기(곧 유령)를 집요하게 대립시키는 마르크스 사상에 함축된 현존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기 위함이다. 이는 기호적 매개와 독립적인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 초기 작업의 연속이다. 둘째, 이러한 대립은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공산주의 내지 사회 혁명의 동력을 이루는 것이 대중의 해방의 열망, 곧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점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유령론은 초기 저작에서 수행되었던 서양 형이상학의 탈구축 작업을 계승하며 확장하는 문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 사상에서 정신 개념의 함의를 분석하는 『정신에 대해서』는 『법의 힘』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는 다소 성격이 다른 저작이며, 스타일상으로는 오히려 초기의 탈구축 저작들과 더 유사성이 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여러 저작들에 나타난 정신 개념의 계보를 추적하며 그의 사유가 어떻게 서양 형이상학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그 용어법 및 사유에 오염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1987년이 데리다가 하이데거와 폴 드 만과 함께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저작은 데리다의 탈구축적인 독서의 묘미를 한글로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역본이라는 점에서도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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