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도의 탁월한 영적 지도자였던 비베카난다는 1863년 1월 12일에 인도 캘커타(현재 콜카타)의 유복한 크샤트리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속명)은 나렌드라나트 닷 타(Narendranath Datta). 유년기에 그는 아주 원기 왕성한 개구쟁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성과 명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아이였다.
16세부터 대략 5년의 기간 동안 프레지던시 칼리지(Presidency College)와 총회 연구소(General Assembly’s Institution)에서 수학하며 철학, 종교학에서 미술,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폭넓게 탐독했고, 인도 고전에도 흥미를 가졌다. 총회 연구소 시절에는 서양의 논리학과 철학 및 유럽의 역사를 연구했다. 특히 H. 스펜서(Spencer)의 진화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0대에는 인도의 근대화 개혁을 주장했던 종교 운동인 브라모 사마즈(Brhmo Samaj)에 참여했는데, 이때 형상 없는 신에 대한 믿음과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 등을 포함한 그의 주요 신념들이 형성되었다.
1881년 그의 나이 18세 때,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 이름은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그는 칼리(Kali) 여신에 대한 헌신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근대 인도의 가장 탁월한 영적 스승 중 한 명이다. 나렌드라는 처음에 그에 대해 다소 거부감을 느꼈으나, 이후에 그의 영적인 힘의 전수(샥티 파타(Shakti Pata))를 통해 삼매 (Samadhi)를 경험한 다음, 마침내 그의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 1886년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나렌드라는 출가하여 스와미(Swami; 힌두 승려)가 되었고, 베카난다로 불리게 된다. 스승 사후 6여 년 동안 바라나가르 사원(Baranagar ath)에서 고행과 명상을 수행하기도 하고, 방랑 수행승으로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성스러운 장소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비베카난다가 영적 교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일이 1893년에 일어났다.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제1차 세계 종교회의에서 인도 대표로 연설을 했는데, 거기서 그는 ‘힌두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통일성과 조화로움,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진 영성 자체’를 강조했다.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유럽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고, 4년 정도 강연과 여행을 하며 다녔다. 1897년 귀국하자 고국에서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그 해에 라마크리슈나 미션(Ramakrishna Mission)을 설립했다. 그 후 미국과 유럽 및 자국에서 스승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2년 7월 4일 벨루르(Belur) 사원에 있던 그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 동안 명상을 하고 나서 칼리 여신에 대한 헌신의 노래를 불렀다. 오후 9시가 조금 지나서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39세.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자신에 대한 예언을 실현했다. “나는 마흔 살이 되는 걸 보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