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한 편 쓸 때마다 나는 심자가 되어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세계와 만난다. “죽는 날까지 청춘으로 살다가 죽은 다음 날에야 하얗게 늙으리”라는 신념이 시를 대면하는 나의 자세고 태도다. 시가 태동하면 축적된 체험과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그럴 때에 후배 시인을 만나면 “나 건드리지 마. 시 나온다”고 농지거리하여 웃음을 질펀하게 퍼뜨린다. 다른 자리에서도 인사말 대신 이 농지거리를 되짚어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를 비우고 나면 다음 시가 넘쳐 날 때까지 나는 1년이고 10년이고 간에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나의 시작(詩作) 습관이고 창작 생리다.
나의 시는 존재의 본질 인식에 대한 미의식의 언어다. 그러니까 인간과 삶과 사물의 있음 또는 우주 현상의 본질적 실재를 미적 감각으로 탐구해 보자는 미의식의 실체가 바로 나의 시(詩)인 것이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한다거나 어떻게 생겨야 한다고 하는 규범화된 목적과 문화적 이념을 의식하고 쓰지는 않는다. 다만 나와 대상과의 필연성과 영적 관계로 맺어진 시정신의 핵(核)이 전류처럼 번쩍, 하고 어떤 충격파를 일으켜 나를 온전히 지배했을 때에, 그것은 마치 화학반응을 일으키듯 언어와 의식이 하나의 동일성으로 융합되어, 고양된 긴장의 언어로 탈바꿈된 시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사회적 명암이나 역사적 전개와 굴절, 인간적 갈등 혹은 그 모순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시의 근본정신은 존재의 본질 파악이나 삶의 궁극에 접근하려는 몸짓에 있다. 그러니까 나의 시는 인간, 인생, 사물, 우주에 관한 서정적 본질을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존재의 실체라고 말해야 좋을 것 같다.
어떤 이념의 실현, 사회적 목적이나 경직된 대상 인식에만 끌리는 것은 그 자신의 개성이고 도구화를 위한 언어적 수단일 뿐, 시가 지향해야 할 충분조건이나 본질적 규범은 아닐 것이다. 시란 것은 언어로 재생된 존재의 실재인 이상 그 어떤 형태의 글보다도 서정적 자아의 자유로운 정신과 명징한 자의식의 발현이고 미적 본질의 해석인 것이며, 포괄적이고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자아 투신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이 존재 그 자체를 다른 양식으로 구현한 언어예술이며 시(詩)이면 되었지, 구태여 상황 논리나 목적의식이나 이즘(ism) 등에 귀결시켜 개별 사상과 사회적 이념의 투박한 목소리를 시 창작 행위로 보는 입장은 그만큼 편견과 단순 논리를 끌어와 시를 구속할 뿐더러 위축 왜곡시키는 행위와 다름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생김새와 성격과 사는 방법이 다르듯이, 시 또한 언어로 그린 개개인의 다종다양한 초상화요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재구성한 존재의 미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사물과 삶과의 은밀한 소통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긴장의 절정에서 집중된 영혼의 언어로 그 대상을 표상(表象)하려고 진력한다. 그러한 자세로 대상과의 일체감을 꿈꾸는 시인이 오늘의 나이고 또한 내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