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가 당선되고 〈작가와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한 후 주로 장편소설을 써서 〈계간 연인〉, 〈문학공간〉, 〈일요시사〉, 〈민주신문〉, 〈주간현대〉 등에 연재 발표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선감도: 사라진 선감학원의 비극』, 『죄의 빙점 형제복지원』, 『대통령의 뒷모습』, 『자물쇠 속의 아이들: 어린 북파공작원의 비밀』과 청소년 소설 『수상한 선감학원과 삐에로의 눈물』, 『수상한 형제복 지원과 비밀결사대』, 『소년 비밀요원과 공동경비구역』, 『보리울의 달』 등이 있다.
성공학-자기개발 광풍은 신흥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점이 있는 성싶다. 진정한 자기계발은 실행하지 않고 자기개발서의 로봇처럼 된다. 허구한 날 자기개발서만 보면서 현실의 삶을 유예하며, 그것은 공상과 몽상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의 일종으로 변질된다. 자기개발 서적을 구입해 읽으며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이나, 그런 책을 직접 써대고 강연하는 사람이나 겉으로는 번지레해 보여도 속으로는 그다지 편안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문제이다.
요즘 관심을 끌고 있는 ‘힐링’은 어떤가? 아무리 유명하고 학식 높은 멘토들의 ‘말씀’일지라도 일시적인 위안을 줄 뿐, 각 개인의 내면에 깊숙이 깃든 본질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진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사랑으로 쓰다듬으면서 대화해야만 상흔은 비로소 꽃으로 피어나지 않을까?
한국 성공학의 원조는 5.16 쿠데타 이후 진행되는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정책으로부터 움이 튼다. 군인들이 ‘성공’한 것이다. 그 후 삼성, 엘지 등 대기업의 사원 연수원이 자기개발의 텃밭이 되었으며 뒤이어 전국민의 생활 속으로 퍼져 들게 된다.
성공의 의미가 유동적이듯 이른바 ‘성공학’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책은 해마다 화장만 조금씩 바꾸고는 쏟아져 나오는데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비평은 전무한 실정이다. 시중에 번역되어 나온 서적들은 미국과 일본의 것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일본의 책은 종교색을 배제한 채 아이디어의 산출과 적용을 지향하는 면이 강한 데 비해, 미국식 성공학은 기독교의 교리를 배경으로 해 인간의 의식과 감정까지 개조하려는 의욕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실패를 거듭한 범상한 사람들의 허약해진 자아는 갈림길에서 시름에 잠길 수도 있을 터이다. 자신의 의식을 저당잡히고 성공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지, 다른 방도는 없는지 모색해 봐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한국의 사회구조와 이곳에서의 삶의 양상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사실상 한국인은 조선 말기 이후 지금껏 고유의 성공 철학을 가꾸어서 생활에 적용할 기회가 없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일본과 미국에 예속되어 온 마당에 일개 처세술이 고유하기를 바라긴 어렵다.
성공학 서적들은 개인의 내적 변화와 초인적 노력에 초점을 맞출 뿐 사회구조의 변혁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하기야 미국 같은 곳에서는 그럴 만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잘못된 구조 하나를 개선하는 게 만인의 성공과 성취에 훨씬 더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성공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것일 뿐. 성공하는 방법이 설령 아무리 좋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자가 더 많다면 그 방법은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풍토와 심성에 맞는 성취학이 필요하며 그것을 탐구해 보는 것도 긴요한 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우선 현상을 객관적으로 짚어 보고 참다운 삶을 위해 지양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하나의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적어도 성공광인(成功狂人)이 되진 말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