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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완전한 이름은 알퐁스 마리 루이 드 프라 드 라마르틴(Alphonse Marie Louis de Prat de Lamartine)이다. 그는 1790년 10월 21일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마콩(Macon)에서 가톨릭 귀족이자 기병대 대위인 아버지 피에르 드 라마르틴(Pierre de Lamartine)과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귀족 출신의 어머니 알릭스 데 루아(Alix des Roys)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콩 근처의 시골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그는 리옹의 기숙 학교를 거쳐 벨레 중학교에서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그리고 프랑스 작가 샤토브리앙 등을 탐독하면서 문학적인 소양을 키워 나갔다.학업을 마친 후에는 어머니의 사촌 집이 있는 나폴리에 머물면서 젊은 여공 안토니엘라(Antoniella)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이후 그는 그녀를 모델로 삼아 소설 ≪그라치엘라(Graziella)≫(1852)를 발표했다. 1816년 요양차 방문한 온천지 엑스레뱅(Aix-les-Bains)에서 만난 여섯 살 연상의 지적이고 아름다운 쥘리 샤를(Julie Charles) 부인은 곧 폐결핵으로 사망했지만 라마르틴의 뮤즈가 되어 그의 시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1820년은 첫 시집인 ≪명상시집≫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데다, 나폴리 주재 대사관 보좌관으로 임명되는 등, 라마르틴이 문학적·사회적 입지를 다진 한 해였다. 그의 외교관 경력은 1830년에 사직하기까지 피렌체 대사관 대리 공사, 토스카나 상업 교류 담당관 등으로 이어졌는데, 그 시기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병행해 라마르틴은 저명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829년 샤토브리앙, 빅토르 위고, 생트뵈브 등의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우했고, 같은 해 샤토브리앙의 추천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당선했다.1830년의 ‘7월 혁명’ 이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입장을 밝힌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라마르틴은 정치에 집중하기 위해 문학 활동을 중단했다. 1848년 입헌 군주인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를 폐위시킨 ‘2월 혁명’에 뒤이어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을 때, 라마르틴은 외무부 장관에 선출되면서 사실상 내각의 수반으로 부상했으며 그해 4월에는 노동 계급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0개 지역에서 입법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그는 참패를 당했고, 실의에 빠진 라마르틴은 그 길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1850년에 파산한 그는 그로부터 죽기 직전까지 20년 동안 잇따라 시, 역사, 비평, 개인적인 술회 등에 걸쳐 저술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살기 위한, 그리고 빚을 갚기 위한 문학적 중노동”이었다. 1869년 2월 28일, 라마르틴은 파리의 자택에서 그의 질녀와 양녀만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1869년 3월 4일 그의 시신은 기차로 파리에서 고향 마콩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들과 파리의 작가들을 포함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을 치른 뒤, 마콩 가까이 라마르틴 가문 소유의 성이 있던 생푸앵(Saint-Point)의 작은 예배당 묘소의 가족들 곁에 안치되었다. 그의 묘비 머리에는 유언에 따라 ‘내 영혼은 소망했노라’를 뜻하는 라틴어 문구(Speravit anima mea)가 새겨졌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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