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전남의 장성, 광주, 전북의 전주 등지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68년 『현대문학』지 추천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 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갈필渴筆의 서書』 등.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
저서 『한국현대시인연구』,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 『시쓰기의 발견』 등.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우리나라 고유어에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다. ‘추醜’나 ‘미움’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전자는 한자어漢字語이고 후자는 ‘증오憎惡’라는 뜻을 지닌, 사랑의 반대말이지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아니다. 왜 그런 것일까.
하르트만의 미학에 의할 것 같으면 ‘추’도 ‘미’의 일부라 한다. 그는 미의 종류를 나누는 도식에 버젓이 ‘추’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 세상에 ‘추’는 아예 없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모든 아름다움은 사랑을 낳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자신에게 결여된 아름다움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어떤 갈망이라 하였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아름답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축복할 때 ‘잘 살라’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라는 뜻인가. 높은 권세를 누리라는 뜻인가. 아니다. 아름답게 살라는 뜻이다.
2023년 7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