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거의 맹목에 가깝게 식민지 시기의 자료를 탐하던 시기에 우연히 눈에 뛴 '동정'이라는 글자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 매료돼 있던 나의 내면을 파고든 그 시점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뭔가 보일 것 같았던 그때의 나는 한국판 <타인의 고통>을 쓰겠노라 객기에 가까운 호언을 일삼았는가 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이 왜 하필 식민지 시기 한국 근대문학 장(場)에서 그토록 중요한 위상을 점하게 되었는지 밝혀보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그때의 호언장담 자체만을 문제 삼는다면 부끄러움밖에 남을 것이 없지만, 그 심각한 환상이랄까 포부, 열정 같은 것이 없었다면 식민지 시기 조선이 남겨놓은 고통과 동정의 서사를 추적해본다는 일은 가능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