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모여드는 곳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작은 공간
원자, 분자, 고체, 액체, 기체도 아닌
성분을 모를 기억들이 쌓인 저장고
죽는 날까지 가득히 채울 수 없는
고작 타원의 공간 속 한편을 차지한
설렘, 희열, 슬픔, 분노, 그 긴장과 전율
그래서 다시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멈춤 없이 접속사를 생성할 때마다
다음 문장들을 아예 툭, 툭, 끊어 버리는
투명한 허공 속 가득 찬 사랑아
2021년 봄, 소래포구에서
나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아니, 볼 수 없다는 말이 맞겠다. 어찌어찌 살다가 시력을 잃었다. 그 이유 탓에 눈이 보일 때 겪은 장면들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그때마다 영화 속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문장으로 꾸려보면 그렇지가 않다. 소중했던 이야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본 산문집을 정리하며 확실히 깨달았다. 세상에 내어놓은 여러 권의 시집도 마찬가지이다. 죄다 정황 전달이 미숙한 문장들 때문에 신변잡기가 되어 버렸다. 새삼 독자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것이 속일 수 없는 나의 실체이고 내 삶이다. 흰 지팡이를 펴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온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가끔 불안했고 지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걸음이 다시 걸어 나갈 수 있는 원초적 힘을 생각했다.
등단 초기부터였다. 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 말했다. 남들과 다른 지점이 읽힌다고 말했다. 그 인사치례에 나는 과하게 으쓱했다. 그것이 내가 살아낼 수 있는 힘이었다. 여전히 부족한 나의 실체를 안다. 그러나 조금은 더 뻔뻔해지고 싶다. 그 버릇이 어디 가랴. 내가 겪은 소중한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지 못한 산문집을 또 세상에 내어 놓는다. 변명이 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완벽은 없다. 대단한 결과를 꿈꾸지 않는다. 문장 위를 뒤뚱뒤뚱 걸을 뿐이다. 힘이 다 하는 날까지 멈춤 없이 걸을 뿐이다. 주어진 삶을 살아낼 뿐이다.
2021년 11월 손병걸
슬픔 한 짐 지고 길을 걷는다
가도 가도 도무지 끝이 없다
부은 발목을 부여잡고 이대로 부서져 내리듯
바람에 흩어져도 좋겠다 싶을 때
빗방울 흠뻑 내린다 이마에 소금 알갱이들은
젖은 유도블록과 유도블록 사이에 스민다
애초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니
발소리는 멈춤 없이 어두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