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추종자들의 모습에서는 스승에 대한 신성한 존숭이나 복종, 경배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추종자들이 그를 부를 때에도 그저 ‘유지’라고 부를 뿐이지 선생님이니 스승님이니 하는 그런 경칭이 없었다. 서로 논쟁을 하다 낄낄거리며 웃고 그러다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질문이 생기면 아무 부담 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 그 질문에 대답한다. 또 그러다 가고 싶으면 떠나고 다 그런 식이었다. 이런 사람이 지구상에 있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동안 이 책을 쓰면서 유지에 관한 책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찍은 동영상을 많이 보았는데 그가 진실로 이 시대 최고의 성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고 싶지 않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느낌이 날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 책에 서술된 유지의 모습에서 진정한 성자 혹은 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렇게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물론 그는 이미 타계하고 없으니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만날 필요가 없다. 그가 항상 밝히듯이 자신은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데 만나서 무엇을 받겠는가.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다 “북촌 가 봤어요?” 하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북촌을 조금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북촌에 가서 짧은 답사라도 시켜주면 깜짝 놀란다. 이곳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가 많으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북촌을 다녔다고는 하지만 간 곳은 카페나 음식점뿐이라 북촌의 진짜 모습은 알지 못한다. 북촌을 답사 대상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지역은 경복궁과 창덕궁이라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두 궁 사이에 있는 지역이니 그곳에 얽혀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풍부하고 많겠는가? 그래서 서울의 역사를 언급할라치면 이 지역은 항상 1 순위로 떠오른다.
그럼, 서(西) 북촌은 어디를 말하는가? 서쪽 북촌은 북촌로에서 경복궁 동편까지를 지칭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분명 조선 후기에 궁에서 직책을 맡은 귀족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1906년의 호적 자료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 중 양반과 관료가 약 44%에 달했다고 하니 분명 ‘권문세가’가 많이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 북촌 기행을 할 때에 설명한 것처럼 이 지역에 있는 집 가운데 진짜 권문세가가 살던 집은 딱 1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윤보선 가가 그것이다. 백인제 가옥이나 한 씨 가옥도 있지만 그것은 조선 사대부들이 짓고 살았던 집이 아니다. 이 두 집은 일제식민기에 유명한 친일파인 한상용이 일본식과 한옥 양식을 섞어 만든 퓨전 한옥이다. 그래서 정통 한옥이라고 할 수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이 넓은 북촌에 진짜 사대부집은 윤보선 가 하나만 남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 지역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이 지역이 작은 한옥들로 뒤 덮여 있지만 당시는 윤보선 가 같은 큰 집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동네 분위기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니 그 지역에 살던 사대부들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 집을 팔고 그 지역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식민기 초에 사람들이 서울(경성)로 모여들어 서울에 주택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 수요에 부응해서 민간의 주택건설회사들이 설립되었고 이들에 의해 ‘구획형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일은 1910년대에 이미 시작됐는데 정세권도 1920년대 이후에 이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 든다. 이때 주택업자들은 사대부들이 남기고 간 중대형 필지를 구입한 다음 잘게 나누어 그 대지에 작은 집을 지은 것이다. 이 서 북촌의 가회동이나 삼청동 일대는 대표적인 한옥 밀집지역인데 이것이 정세권의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의 북촌은 이때부터 형성되어 온 것인데 1960년대나 1970년대까지 이 지역은 학교나 공공시설을 제외하고 이런 작은 한옥들로 채워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서 북촌 안으로 들어가자. 서 북촌을 답사하는 코스는 여러 가지가 가능한데 크게 보아 대체로 두 가지 코스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두 코스는 시작 지점이 다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일단 소개하는 코스는 짧은 코스로 시간이 얼마 없을 때 택할 수 있는 코스이다. 이 코스는 빠르게 움직이면 30분 정도면 충분한데 각 유적을 심도 있게 충분히 보려고 한다면 2시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앞으로 볼 지역은 서 북촌에서도 서쪽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그러니까 경복궁 쪽에 연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서 북촌의 반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다른 반, 즉 서 북촌의 동쪽 지역은 다음 권에서 다룰 것이다. 그 답사는 지하철 안국역 1번 출입구에서 시작하는데 주요 답사지로는 윤보선 고택, 백인제 가, 이준구 가, 북촌한옥길 등이 포함된다. 이 유적들에 대한 설명도 한 권의 분량이 될 터인데 그것은 그때 보기로 하고 우리는 북촌의 짧은 답사를 시작하자.
북촌의 유일한 전통 사대부집은 윤보선 가옥 1채뿐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다 “북촌 가 봤어요?” 하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북촌을 조금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북촌에 가서 짧은 답사라도 시켜주면 깜짝 놀란다. 이곳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가 많으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북촌을 다녔다고는 하지만 간 곳은 카페나 음식점뿐이라 북촌의 진짜 모습은 알지 못한다. 북촌을 답사 대상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지역은 경복궁과 창덕궁이라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두 궁 사이에 있는 지역이니 그곳에 얽혀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풍부하고 많겠는가? 그래서 서울의 역사를 언급할라치면 이 지역은 항상 1 순위로 떠오른다.
이 북촌이라는 지역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누가 나에게 북촌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가장 좋겠느냐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가장 간단하게 답해주는 것이 최고다. 그래야 상대방의 머리에 쏙 박힌다. 요즘처럼 정보가 해일이 난 시대에는 무엇이든 가장 간단하게 전해주는 게 제일이다. 북촌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한국에서 한옥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어림잡아 천 채 이상의 한옥이 있다고 하니 한옥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다. 한옥이 그렇게 많으니 영역도 대단히 넓다. 전국에 이렇게 많은 한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없다. 한국에서 한옥 집결지로 이 북촌에 버금가는 곳은 전주한옥마을일 터인데 그곳 역시 북촌보다는 한옥의 숫자가 훨씬 적다.
이 지역에 이렇게 한옥이 많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잘 알려진 대로 이 지역은 조선 시대 때 관리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이 관리들은 관청에서 일하던 공무원인 셈이다. 그럼 현재 우리가 이곳에서 발견하는 집들은 그들이 살던 집일까? 잘못 생각하면 그 관리들의 집이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사실에서 아주 멀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집 가운데 조선의 관리가 살던 집은 딱 1채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크게 놀란다. 이 지역이 한옥마을이라 불리니 당연히 옛날, 그것도 조선조때 지은 집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런 집이 딱 하나밖에 없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집은 우리가 곧 보게 될 윤보선 가옥이다. 그 외에 대부분의 한옥은 중소형의 작은 것이고 조선의 관리들과 아무 관계없는 집들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런 집 외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집이 또 있다. 이 집들은 조선의 관리가 살던 집도 아니고 중소형 한옥도 아니다. 이 집은 일제기에 관직 등에 있었던 사람들의 집으로 지금은 단 3채만이 남아 있다. 각각 백인제 가옥과 윤치왕 가옥과 김형태 가옥이 그것인데 특히 앞의 두 집은 규모가 상당해 저택이라고 해도 문제없을 정도다. 우리는 이 집들도 들릴 터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면 되겠다
그럼, 서(西) 북촌은 어디를 말하는가? 서쪽 북촌은 북촌로에서 경복궁 동편까지를 지칭하는 지역이다. 이 책은 북촌에 대한 세 번째 책으로 마지막 책이 되겠다. 북촌에 대해 쓰려고 했을 때 지금처럼 3권이나 쓸 줄 몰랐다. 특히 이 서쪽 북촌을 2권으로 나누어 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 대해 쓰다 보니 이곳을 한 권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에 대해 할 이야기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한 2년 전쯤 되는 것 같다. 대학에서 가르친 지 한 10년이 돼서 그런지 자꾸 꾀가 생겼다. 교수가 수업 준비를 별로 안 해도 되면서 생동감 있는 수업 거리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끝에 학생들과 서울 시내 유적지를 찾아 돌아다니면 어떨까 하는 묘안(?)이 떠올랐다. 학생들은 익히 아는 서울이지만 분명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 외의 성공이었다. 자기들에게 친숙한 서울에 이렇게 많은 유적과 이야깃거리가 있다는데 학생들이 너무나 놀랐던 것이다. 어느 학생은 자기가 맡은 지역에 사전 답사를 세 번씩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고도 힘들어하기는커녕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도 한 듯 상기된 얼굴로 우리를 대하곤 했다.
이를테면 그저 장충단공원이라고 알았던 데에 그토록 유서 깊은 이야기가 많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장충단은 남산의 한 자락에 불과하니 남산 전체에는 또 얼마나 많은 유적과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학생들에게 답사 지역 조사를 맡겼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전문적으로 조사를 해야 됐고 훨씬 더 꼼꼼히 보아야 했다. 그 결과 나도 학생들과 같은 체험 즉, 서울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본문에서도 가끔 말했지만, 이전에 나는 서울을 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면서 서울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본문에서도 가끔 말했지만,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파들어갈수록 나는 서울을 그다지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아니 어떤 때에는 서울이 마치 낯선 도시처럼 다가온 적도 많았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재미에 답사에서 오는 피로함도 곧잘 잊곤 했다.
현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사후생은 지상의 삶보다 훨씬 더 장대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인류는 이제야 죽음에 대해 눈을 떠가고 있는데 그 촉발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근사체험(임사체험)에 관한 연구였다.
인간의 삶은 크게 죽음 전의 삶과 죽음 후의 삶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죽음 전의 삶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 죽음 뒤의 삶, 즉 우리 삶의 다른 반쪽에 대해서는 사는 데 바쁘다는 이유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죽음이 어찌 그렇게 무관심한 소재이겠는가? 죽음이 삶과 따로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겠는가 말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살지 않겠다는 것돠 마찬가지이다.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지사(人間之事)란 항상 미리 준비하면 손해날 것은 없다.
내가 속해 있는 국제한국학회에 예술문화 분과를 만들어 동학들과 같이 우리 예술을 현장 중심으로 공부하려 했고, 학교에서의 강의도 예술 중심으로 다루며 그 지평을 넓혀 나갔다. 틈나는 대로 사계의 전문 동학들과 열심히 답사도 다녔다. 그렇게 하기를 5년 남짓, 이제 한국예술은 어렴풋이 내게 다가왔다. 그야말로 이 책은 그 여정의 결과물인 셈이다.
물론 우리 예술을 전체적으로 터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동안의 연구결과는 이른바 21세기 초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조선후기의 예술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조선 후기의 예술인식을 '자유분방함'이라는 키 컨셉(Key concep)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 책에서 나는 이 개념을 가지고 조선 후기 예술의 전 장르를 훑어 보았다.
저는 이 책에서 문기와 관련해서 한국인이 생산한 문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골라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보아도, 그 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려는 것이지요. 사실 전체 문화 가운데 일정 부분이 아니라 한 가지만 보아도 그 문화의 전체적인 수준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 하면 지레 고리타분하다고 얼굴부터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종교는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고, 아미타 이름 외워서 극락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찾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한국인들이 지금 갖고 있는 가치관은 어떤 종교에 의해 형성된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무교(巫敎)와 유교이다.
사람들은 종교 하면 지레 고리타분하다고 얼굴부터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종교는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고, 아미타 이름 외워서 극락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찾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한국인들이 지금 갖고 있는 가치관은 어떤 종교에 의해 형성된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무교(巫敎)와 유교이다.
사람들은 종교 하면 지레 고리타분하다고 얼굴부터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종교는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고, 아미타 이름 외워서 극락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찾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한국인들이 지금 갖고 있는 가치관은 어떤 종교에 의해 형성된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무교(巫敎)와 유교이다.
한국은 역사가 매우 오래된 나라이다. 따라서 민간 신앙도 역사와 왕조를 달리하면서 다양하게 생겨나고 없어졌다. 이 작은 책에서 그 전체적인 발전을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과거의 민속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옛날 전통이 지금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지 그거 과거의 것이라고 해서 다 값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는 분명히 문화국이다. 우리 문화의 전통은 생각보다 수준이 높다. 세계적으로 놀랄 만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그 저력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현재를 지탱해 주는 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화천민"처럼 살고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문화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천민문화를 방치할 수 없다. 우리 현대 문화의 천박성을 제대로 알고 고쳐나갈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문화유산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우리의 문제점도 분명하게 짚어낼 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아울러 훌륭한 문화유산을 낱낱이 소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단점과 장점을 바로 알고, 그것들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계승해 나갈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해 나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진정한 문화국민이 되는 것이다.
정 교수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우리 음식에 대한 공부는 매우 유익했을 뿐만 아니라 귀중한 지식을 얻게 해주었다. 한식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이상적인 자연건강식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우리 음식 하나하나가 대단히 복잡한 문화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문화라는 것을 인간의 세련된 감각이 자꾸 더해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면, 한식은 다른 어떤 나라의 음식에 못지않은 섬세한 문화적인 과정을 거쳐 나온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