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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빅터 플레밍 (Victor Fleming)

성별:남성

국적:아메리카 > 북아메리카 > 미국

출생:1889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물고기자리)

사망:1940년

직업:영화감독

데뷔작
0년 <구름이 흘러갈 때>

최근작
2024년 11월 <[블루레이] 오즈의 마법사>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

1939년은 할리우드 최고의 해였다. 빅터 플레밍에게 1939년은 이상한 해였다. 같은 해에 연출한 <오즈의 마법사 The Wizard of Oz>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두편의 영화만으로도 빅터 플레밍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들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했다. 플레밍은 기교나 능력면에서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감독이었지만, 불행히 그가 활동하던 30년대 할리우드는 감독이 작가로서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때이기도 했다. 따라서 플레밍은 창작자로서의 도전이나 모험보다는 스튜디오와의 타협 속에 영화를 만들어야 했으며 게다가 그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출하면서 상대해야 했던 프로듀서는 ‘할리우드의 독재자’ 데이비드 셀즈닉이었다. 그 결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두고두고 플레밍보다는 셀즈닉의 영화로 알려지게 됐다.

플레밍이 감독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였고 경력도 특이한 구석이 있다. 할리우드에 오기 전 그는 꽤 알려진 자동차 레이서였으며 비행기 조종사이기도 했다. 우연히 할리우드에서 운송부 일을 도와주다가 촬영부에 들어가게 된 플레밍은 나중엔 카메라맨이 됐고 1910년대 초창기의 할리우드에서 D.W. 그리피스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같은 거장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다.

1차대전이 터지자 전쟁홍보단의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던 그는 할리우드로 돌아온 뒤 몇편의 무성영화에서 촬영감독을 하다가 1919년에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를 주연으로 한 <구름이 흘러갈 때 When the Clouds Roll by>로 감독에 데뷔한다. 이후 <오즈의 마법사>를 연출하기 전까지 그가 만든 39편의 영화는 한결같이 능숙한 장인의 솜씨,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연출한 <맨 트랩 Man Trap>(1926)과 <훌라 Hula>(1927)는 클라라 보를, <버지니안 The Virginian>(1929)은 게리 쿠퍼를 스타덤에 올려놓기도 했다. 특히 촬영감독 출신답게 그가 구사한 앵글은 빈틈없고 정확했다. 이렇게 20여년간 영화를 만들어 오면서 플레밍은 이른바 ‘프로듀서의 스튜디오’라고 불리던 MGM에서 활약하던 조지 쿠커와 함께 대표적인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영화공장의 감독이 됐다. 그는 서부극, 코미디, 전기물 등 폭넓은 장르를 넘나들었으며, 특히 1930년대에는 <화이트 시스터 The White Sister>(1933), <보물섬 Treasure Island>(1934), <커리지 선장 Captain Courageous>(1937) 같은 모험활극과 액션감독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사실 쿠커와 플레밍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라이벌이자 흥미로운 비교의 대상이다. 당시 할리우드를 호령하던 초일급 스튜디오 MGM의 대표감독이던 플레밍과 쿠커는 작품 스타일에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주로 섬세한 멜로나 코믹드라마를 연출했던 쿠커가 ‘여배우의 감독’이었다면 플레밍은 클라크 케이블, 스펜서 트레이시 등 당대 최고 배우들과 박진감 넘치는 남성세계를 그렸던 ‘남자배우의 감독’이었다. 뿐만 아니라 촬영감독 출신답게 플레밍은 기술이나 조명에서도 완벽을 추구했다. 그가 연출했던 <버지니안>은 막 발성영화의 시기로 접어들던 할리우드에서 모범답안에 가까운 사운드의 완성도를 이루어냈다.

쿠커와 플레밍의 경쟁관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원래 이 영화의 감독은 조지 쿠커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했던 쿠커는 기획에서부터 제작 전반에까지 시시콜콜히 참견을 일삼았던 데이비드 셀즈닉과 대립했고, 급기야는 셀즈닉에 의해 해고되고 말았다. 플레밍이 셀즈닉의 호출을 받은 것은 그가 <오즈의 마법사>를 막 끝마치고 난 다음이었고,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쿠커 대신 현장에 투입된 플레밍은 셀즈닉과의 ‘협업’으로 제작을 무사히 마쳤고 영화는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해 오스카를 거의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플레밍의 불행 또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완성됐다. 영화는 명작이 됐지만 오늘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빅터 플레밍의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 그리고 모든 성공과 영광을 일사불란한 지휘력으로 ‘만들어낸’ 프로듀서 데이비드 셀즈닉의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대의 할리우드에서도 많은 감독들이 프로듀서와 갈등을 겪고 있고 몇몇 감독은 아예 프로듀서까지 겸업함으로써 이같은 갈등을 극복하려 하지만, 플레밍의 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빅터 플레밍의 작품들은 감독이 스튜디오 시스템 내부에서 남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표본으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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