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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태어난 구로사와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의 책을 탐독하고 미술에 관심을 기울인 사춘기를 보내고 36년 24살 때 도호 영화사에 취직했으며 연출부 말단부터 차근 차근 길을 밟아 33살 때인 43년 <슈가타 샨슈로>로 데뷔했다. 비교적 과작인 구로사와의 전성기는 50년대. <라쇼몽>이 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구로사와의 운이 트였다.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두고 산적과 사무라이의 아내,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과 나뭇꾼의 증언을 교차시킨 이 영화는 일본 시대극을 '현대화시킨' 구로사와의 취향이 잘 드러난다. 초반부에 나뭇꾼이 숲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장면에서 라벨의 음악 '볼레로'를 깔면서 다양한 촬영각도로 나뭇꾼의 행동거지를 잡아낸 연출은 당시 일본영화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구로사와의 서구식 화술은 또 다른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돋보인다. 산적들의 습격을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사무라이들을 고용해 산적들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서부영화를 빼닮았다. 이 영화 속의 사무라이들은 서부에 문명화된 사회의 기초를 닦기 위해 무법자들을 제압하는 존 포드 서부극의 총잡이들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잘 다듬어진 일본식 정원처럼 세세한 인공적 솜씨를 느끼게 하는 구로사와의 연출은 존 포드식의 고전영화 화법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빠른 이동촬영과 편집으로 극적인 장면에 방점을 찍으면서 구로사와는 자신의 영화에 서명을 남겼다. 이 영화는 공동체의 단결을 묘사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동선을 원 형태로 연출한 '원구도'로도 유명하다. 구로사와는 자기 영화에 가부끼의 연기양식을 곧잘 도입해 꾸미는 것으로 서구와 일본의 접합을 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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